[깡박] 불공정연애협약 中
- 뎅탕
그리 창백해지지도, 일그러지지도, 시름에 잠기지도 않았지만 아무렇지 않지는 않아 보이는 강슬기가 느릿하게 눈을 깜박였다. 강슬기가 갑자기 극도의 인간미를 발산하여 휴머니즘의 극치를 맛보여준다고 해도 당장 입에서 튀어나간 미안해를 주워 담고 싶지는 않다. 얘가 나한테 정착하는걸 바라지도 않는다. 이 한 몸 희생해서 개망나니 끌어안고 강물에 뛰어드는 논개 작전으로 서울 전역을 겨누고 있는 망친 연애라는 총 속에 강슬기를 장전하는걸 방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섹스 좀 했다고 앞길 조지기엔 좀 억울하다. 일단 한번 되물었다.
"어, 내가 잘 못 들은 거 아니지?"
"아니야."
쐐기가 박혔다. 탄수화물과 액상과당, 술과 섹스를 끊은 후 개운하게 맑아진 뇌가 급속도로 혼탁해지는 게 느껴졌다. 첫 키스 직후의 어색함을 뛰어넘는 낯 뜨거운 뻘쭘함에 수영이 눈길을 피한 채 뭐라고 하는 줄도 모르고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니가, 니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 한지 모르겠는데 난 잘 모르겠고."
"모르겠는거야,"
강슬기의 눈은 습기가 더 해지지도 않았고 얼굴엔 어떤 굴욕감도 없었다. 개운해보이지도 않았고. 아쉬워보이지도 않았다.
"싫은거야."
입을 꾹 다문 채 슬기를 노려보던 수영이 거꾸로 되물었다.
"너 그런 식으로 여자 꼬셨니?"
"꼬신 적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 알아서 넘어왔다 이거지. 거절당하는 삶을 전혀 알지 못할 강슬기가 왜냐고 묻는 상상을 했다. 앞길이 막막했다. 과연 강슬기가 물러설까. 물러서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물러선다면 또 어떻게 될까. 영영이란 단어가 우리 사이에 생긴다면 어떻게 될까. 부정적이거나 긍정적이거나. 자포자기한 심정의 수영이 물었다.
"그 정착이란 게 뭐냐?"
"니 여자 친구가 되고 싶어."
"이제와서?"
재채기보다 빠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가도 피가 식고 낭패감이 몰려왔다. 이제와서는 또 뭐야? 니 고백 내내 기다려 왔었다는 거 같잖아 이거. 나는 왜 단호하게 꺼지라는 말을 못하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은근슬쩍 여지에 미련 줄줄 흘리는 거지? 수영이 본인의 없어 보임에 심란해 하며 이마를 문지를 때 강슬기가 말했다.
"늦어서 미안해."
"아니, 야 너 웃긴다. 내가 뭐, 야 와... 너 진짜 웃기는 애다. 꼭 내가 뭐 너 기다린 것처럼 말한다? 너 진짜 너, 너어는."
밑천이 드러난 건 피차일반인데 먼저 말을 더듬은 건 박수영이였다. 황당하고 무계하며 낯 뜨거운 마음에 말을 더듬는데 강슬기가 멀끔한 얼굴로 덧붙였다.
"나는 너 기다렸어."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 아닌가? 가끔 보면 강슬기 같고 좀 기분 더럽네.
수영은 보다 단호한 어조로 강슬기의 진심을 다 질린 음식처럼 물렸다. 강슬기는 시원하게 물러서지도, 다시는 너를 보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덩달아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강슬기는 관계에 칼을 꽂았고 박수영의 심리 상태엔 핵폭탄이 떨어졌다. 좋게 말하면 본인만의 세계에 살고 있으며 나쁘게 말하면 반경 20미터 이내의 모든 인격체를 무차별 강퇴시키는 안하무인 강슬기에게 당할 후환이 두려웠다. 진심이다. 수영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영혼을 상실한 채 낮을 보냈다. 본인이 느낀 대부분의 감정과 겪은 일의 반 이상은 누군가에게 말해야만 속이 개운해지는 이시대의 소인배 박수영은 주에게 조르르 보고까지 했다. 전달하고자 하는 말끝에 마침표를 찍자마자 느낀 개운함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적인 감정은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극도로 발달한 주의 시시비비를 명명백백히 가리고자 하는 냉철함에서 우러나오는 답변에 휘발되었다.
"그러게 쌩까라고 했잖아. 이렇게 될 줄 몰랐어? 쌩까."
"아 그건 좀."
"호더니? 그렇게 싫다면서 강슬기와의 추억을 수집하고 간직하려는 이유가 뭐야? 수영아 박수영아, 아니다 싶을 때 놔야해. 붙잡고 있다간 패가망신 못 면한다. 대학원 온 나 처럼."
주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 찾아온 살신성인일까
"꺼지라고 하기 좀 그래서 알아서 지쳐 떨어져 나가길 빌어? 손 안 쓰고 코풀고파? 아니면 생체딜도 못 잃어 심리인가? 강슬기도 강슬긴데 너도 참 연구 대상이다."
아니면 무차별한 팩트 폭행범일까. 속사포로 쏟아지는 인격 모독에 준하는 팩트폭행에 감정이 상해 멋대로 전화해놓고 멋대로 끊었다. 탈력감에 숨을 몰아쉬었다. 링 코너에 내몰린 기분이었다. 안 그래도 강슬기가 조성한 분위기에 흠씬 두들겨 맞은 상탠데 맞는 말만 줄줄 늘어놓는 척척 석사에게 쳐 맞기까지 했다. 아, 운동 갈 기분 아니야. 오늘 쉴래. PT트레이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가 회원님으로 시작하는 반 협박조의 메시지로 까이고 미적대며 집을 나설 때도, 스쿼트 마지막 두 번을 남겨놓고 반 눈물바람으로 빌 때도 치밀지 않았으며, 분명 십초만 버티라고 해놓고 일고오옵 여더어어얿 수영씨 오늘밖에 날씨 어때요?(지랄 말고 숫자나 세라고요.) 어휴 이런 날엔 인터벌 해야 하는데 끝나고 인터벌 가실래요?(아니오!!!) 아호오옵 이 짓거리로 체감 3분을 버티게 할 때도 덜 치밀었던 부아가 강슬기 생각 하나로 치밀어 오른다.
거기에 실제 등장이면 어떨까?
샤워를 할 기운도 없이 온몸의 육즙과 함께 헬스짐을 나설 때 쇼윈도 밖 강슬기와 눈이 마주쳤다. 교류가 두절된 일주일간 어떠한 육체적 정신적 기스 하나 없어 보이는 얄밉도록 번지르르한 강슬기가 대뜸 눈을 가렸다. 아, 나 지금 못볼꼴인가? 옆 전신거울을 보니 하체운동 종합세트로 조져져 엉거주춤하게 선 상기된 육체가 있다. 아, 맨날 왜 이렇게 없어보일때만. 얄미운 마음에 노려볼 때 눈을 가린 손을 치운 강슬기가 들리지 않게 말했다. 까꿍.
문을 나서면서 할 말은 골라 놨었다. 대가리에 총 맞았니? 아연을 실색하고 어기적대며 나오는 수영을 본 강슬기가 수영이 나온 건물을 올려보고 물었다.
"항문외과 다녀왔어?"
삼초 전 부린 치명적인 끼는 어디로 갔을까? 수영이 반사적으로 뱉었다.
"뒤지고 싶냐?"
"엉덩이 아파?"
"아, 뭐래. 아니라고 오늘 하체운동 해서 그런다고."
"운동했어?"
"어, 운동했다. 왜. 그만 물어봐. 여긴 왜 왔어?"
"카톡해도 안 보길래... 그냥 왔어."
가방 속에 묻혀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뭐해? 단 하나. 기가 차는군. 용건도 없이 찾아온 짝사랑 유발자 강슬기가 잘 어울리는 미성으로 말했다.
"맥주 마시러 가자."
"운동했다고 몇 번을 말해."
"운동하면 맥주 못 마셔?"
"기껏 빼놓고 술을 마시냐?"
닭가슴살 튀겨먹기가 특기이자 취미인 수영이 부러 퉁명스럽게 말하자 강슬기가 입술을 비죽였다.
"그럼 나만 마실게 너는 탄산수 마셔."
뭐야? 얘 지금 나한테 목 메는 거야? 굳이 그렇게 해서라도 나랑 가고 싶다는 거야?
지금 느껴지는 이 혼란스러움은 과연 무엇일까? 아무리 봐도 도망간 여친 쫓아 온 모양새를 한 10년지기의 매력어필에 비위가 상하는걸까 아니면 다시금 강슬기가 만든 소용돌이 속에서 돌고 있는 걸까? 기분이 개 같은걸 보니 소용돌이가 아니라 물 내린 변기 속에서 돌고 있는 것 같다.
"아 싫어. 왜 너만 맥주 마셔?"
정도를 모르고 질주하는 본인의 앙탈에 수영은 낯이 뜨거웠건만,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이라는 얼굴의 집착 유발자 강슬기는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럼 마시고 싶은 만큼만 마셔. 자리를 옮기는 강슬기의 등짝을 보았다. 달랑거리는 가느다란 손목도 보았다. 목구멍 끝까지 2차 앙탈이 끓어올랐다.
"야, 잠깐만."
충동 유발자 강슬기가 돌아보았다.
"나 니네집 에서 샤워 좀 하고 갈래."
천근만근으로 축축 쳐지는 팔을 들어 머리를 겨우 감고 나니 농도 짙은 현타가 찾아왔다. 내가 이 집에 다시 발을 들이다니. 몸에 묻은 땀과 아드레날린을 씻어내고 나니 차분해진 내면의 목소리가 수영을 엄중히 심문하기 시작했다.
강슬기가 찾아왔을 때 아주 티끌만큼이라도 반가웠나? - 느꼈다. 나도 정이 있는 사람이기에 반가움을 느꼈다.
강슬기와 맥주를 마실 생각이 있었는가? - 있었다. 몇 번 튕겨본거다.
그럴 거면서 왜 튕겼느냐. - 강슬기도 인생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쟤도 느낀 점이 있었을 거다. 느낀 점이 있었으니 주둥이 내밀고 탄산수 어쩌고저쩌고 하지 않았는가.
미래통합당 고인물적인 우기기의 연속에 질린 내면이 빈정였다. 샤워를 하고 가겠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정말 샤워만 할 생각인가? 본인이 가진 숨겨진 매력인지 흉함인지 모를 앙큼함을 마주한 수영은 저도 모르게 00년대 초반 드라마 남주인공처럼 주먹으로 벽을 두들겼다. 안 그래도 추접해진 마당에 주접까지 떤다. 미친 거 아닐까.
세미 절교를 해 놓은 마당에 지조도 없이 제 입으로 먼저 발칙하게 샤워를 하고 가겠다고 하다니. 차라리 라면을 먹고 가겠다고 할 걸. 이 사단이 난 이유는 무엇일까. 강슬기와의 추억을 앞으로도 수집하고 간직하고 싶은건가? 생체딜도 못 잃어 심리인가? 아니면 정말로 강슬기에게 어떠한 심리적인 미련이 있는 건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영은 별안간 차분해진 마음으로 본인을 다독였다.
그래. 씻고 바로 머리 말리고 나가서 맥주 한잔 하면서 마무리 짓자. 쌩을 까던가 사귀던가 결판을 내자. 섹스는 대화 다음이다. 아니 영영 안 할 거야. 오랜 습관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끓는 하반신을 어르고 달랜 보람도 없이 이 모든 고뇌의 조력자이자 이 사단의 주인공 강슬기가 노크 하나 없이 욕실 문을 열어 재끼고 등장했다. 박수영은 새삼스럽게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가리려 들며 따졌다.
"아, 뭔데! 씻잖아!"
"나도 샤워."
"나 끝나고 해. 거의 다 했어."
강슬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티셔츠를 올려 벗으며 말했다.
"그럼 다 하면 먼저 나가."
"그딴게, 너 그딴게 어디 있어. 너 나한테 이상한 짓 하려고 하는 거지."
"이상한 짓?"
"눈깔 그렇게 뜨지 마. 너 꼭 눈깔 그렇게 뜨고 나한테 와가지고 맨날..."
"맨날 뭐?"
"맨날...!"
"거기 아래에 바디워시 좀 주워줘."
"미친, 그런 건 니가 주워."
"니가 더 가깝잖아."
섹스는 대화 다음이라는 다짐이 무색하게도 이 뒤로 엄청나게 섹스 했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통에 허리를 숙이고 욕조를 짚은 박수영은 이 사단의 원인이 미온한 얼굴로 다가와 아무렇지도 않게 등을 문질러 비누거품을 내던 강슬기가 아니라 어쩔 줄 모르고 눈알만 굴리다 먼저 입을 맞추던 본인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대가리에 똥만 찬 건 강슬기가 아니라 내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한 세 번 중에 한번은 내가 먼저 눈치줬던것 같네. 눈치 드럽게 없으면서 꼭 이런 눈치만 빠르군.
눈앞에 대령된 먹잇감은 절대 놓치지 않는 인간 포식자 강슬기가 20분전 수영의 작태에 대한 조롱 한번 없이 선반 문을 열며 물었다. 발치에 떨어져 있는 다 쓴 콘돔이 들어 있던 선반이었다.
"한 번 더 할래, 그만 할래?"
"... 여기서 말구."
젖은 몸뚱이로 구르다시피 나갔다. 골반 위에 앉아 기껏 건넨 바스가운을 열어젖히는 강슬기에게 충동적으로 물었다.
"넌 나랑 왜 하냐?"
뱉어놓고 후회했다. 널 좋아하니까, 니가 좋아하니까 라고 하면 나는 뭐라고 해야 할까. 거기 맥주 좀 달라는 투로 여자 친구 자리에 지원서를 제출했던 강슬기처럼 뻔뻔하게 모른 채 하며 하반신의 욕망만 채운 채 모르쇠로 일관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면 주섬주섬 챙겨 입고 자리를 떠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도 없어 보이는 선택지뿐이다. 왜 나는 강슬기 앞에선 항상 개쪽을 면치 못할까? 다짜고짜 귓방망이 갈기던 강슬기의 여친 앞에서 눈물 짜고, 밤에는 몸으로 용서를 비는 강슬기 앞에서 눈물 짜고. 너랑 엮이는 거 사양이니 꺼지라고 했다가 지금 빼지 말고 한번만 더하자고 징징거리고. 니가 그런 말 하는 거 불편하다고 선 그어 놓고 라면 끓여주면 안되냐는 투로 앙탈 부리며 제 발로 집에 기어들어 오고... 강슬기에겐 결핍된 인간미일까 아니면 추잡함일까. 성욕일까 미련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영은 올라 타 앉아있는 강슬기가 내리칠 개쪽의 단죄를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떤 대답이 나와도 뜨거워질 낯을 가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삼초 전 까지 샤워가운을 열어젖히고 맨살에 이를 가져다 대던 강슬기가 정온한 얼굴로 수영을 내려 보았다. 차라리 말없이 했으면 좋겠다. 상황마다 적절한 강도와 방법으로 말문을 틀어막는 재주가 있는 강슬기가 입을 열려는 찰나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반 쯤 맨몸인 수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옆집에서 찾아온 건가? 아니면 욕실에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댔으니 아랫집에서 찾아온 건가? 수영이 제 발을 저리며 몸을 일으킬 때 다시 양심과 모럴이 사망한 얼굴로 돌아온 강슬기가 느릿하게 말했다.
"무시해."
"아, 누군 줄 알고 무시해! 얼렁 나가봐!"
"알아. 그냥 무시해."
뻔한 상황에 수영이 눈을 치떴다.
"여자냐?"
"어, 무시해."
"어떻게 무시해. 개소리 하지 말고 비켜! 나 안에 있을 테니까 나가서 수습하고 와."
"무시해도 되는 애야."
강슬기가 공감능력 결여라면 나는 과잉이 아닐까? 알 수 없는 이유로 연락이 두절된 여자 친구를 찾아와 너머에 두 명 이상의 인기척이 느껴지는 문을 두드리고 있는 미지의 여인에게 이유모를 죄책감이 드는 박수영이 강슬기의 몸을 뿌리치며 짜증을 냈다.
"그딴게 어디 있어, 너는 무시해도 될 애랑 무시하면 안 될 애 다르냐?"
"어, 달라."
강슬기가 안 어울리게 잘라 말하며 손목을 부여잡고 자세를 숙여 귓바퀴를 물었다. 성급한 잇질과 문 밖의 채근에 쾌락 세포는 이미 내뺀 지 오래인 수영이 눈에 쌍심지를 켜고 추궁했다.
"어떻게 다른데? 뭐가 다른데."
이유가 뭘까, 강슬기가 답지 않게 마찬가지로 눈에 불을 켜고 말했다.
"다 너랑은 달라."
개쪽의 단죄를 피하려다 피하고 싶던 회초리를 얻어맞았다. 수영은 모골이 송연해졌다. 이 회초리는 깨달음을 주기 위한 회초리일까? 박수 영은 본인이 그렇게도 모른 채 하고 묻어버리고 넘겨버리고 싶은 것들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십 년째 지지부진하게 이어져 가는 강슬기와의 관계? 심심하면 찾아와 문 두드리며 산통 깨는 강슬기의 여자들? 아니면 나에 대한 강슬기의 마음? 아니면 이도저도 못한 채 휩쓸리는 척 하면서 죄악감 하나 가지기 싫어하는 나의 태도?
문 두드리는 소리 하나로 동물의 왕국에서 사랑과 전쟁, 그리고 종국에는 격정멜로가 되어버리고 만 분위기에 수영이 진이 빠져 슬기를 밀어냈다.
"일단 저 밖에 좀 어떻게 하고 와."
생전 그런 적 없던 강슬기가 노여운 얼굴로 몸을 일으켜 문가로 다가갔다. 벌컥 문을 열어젖힌 강슬기의 분노한 미성이 들려왔다.
"씨발, 뭐야."
"어, 있는데 어쩔 건데. 찾아오지 말랬잖아. "
"니가 무슨 상관이야."
뻔하고 새삼스러운 사건에 수영이 자연스럽게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문이 반쯤 열리고 옷이 쌓여있는 옷장 안으로 들어가 맨몸을 웅크렸다. 현관의 낯선 운동화를 보고 언제 쳐들어와 행패를 부릴 지 모를 미지의 여인을 피하는 것인지 아니면 섹스 하나 방해받은 것 치고는 지나치게 화가 난 강슬기의 목소리를 피해서인지 이유가 분간이 안 갔다. 강슬기의 여자들이 두려워하는 옷장 속 괴물이 된 것으로 몇 분 전까지 하반신에서 타오르던 열정을 분실하고 냉정을 되찾은 박수영은 고분고분하게 어떻게 좀 하고 돌아와 왜 거기에서 그러고 있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옷장 문을 여는 강슬기에게 차게 말했다.
"너, 나랑 얘기 좀 하자."
***
"니가 하지 말라는거 해서 미안해."
강슬기 입에서 나오는 미안하다는 말 만 들으면 10년 들여다봐도 물길처럼 안 보이던 속내를 어떻게 해서라도 들여다보고 보듬어 주고 싶어지는 고질병에 시달리는 수영이 진절머리를 치며 쏘아붙였다.
"내가 뭘 하지 말라고 했는데?"
"다른 사람 상처주지 말라고."
"웃긴다. 니가 언제는 내 말 잘 들었냐? 그리고 니가 나한테 왜 사과해 그 사람한테 사과해야지?"
"사과 할 일 아니야. 난 잘 못 안했어."
"그딴게 어딨어."
수영은 별안간 헛웃음이 나왔다.
"되게 웃긴다."
"뭐가?"
"뭐, 막... 우리가 사귀는 것처럼 말하잖아."
"정말 사귀면 안 돼?"
"안 돼. 왠 줄 알아?"
그때와 같이, 창백하지도, 일그러지지도, 시름에 잠기지도 않은 얼굴의 강슬기가 말했다.
"아까 온 사람 여자 친구 아니야."
지금 얘 변명하는 건가? 천하의 강슬기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중급 화술을 사용하는 신비로운 장면을 목격했으나 수영은 눈 하나 깜짝 않고 답했다.
"그게 문제라고. 그게 싫다고. 니 여자 개 많잖아. 줄 섰잖아. 그리고 여자 친구 아닌데 니네 집은 왜 알아?"
"모르겠는데..."
"니가 알려줬겠지."
"안 알려줬어."
맥주를 깨작이는 강슬기의 얼굴에서 낯선 억울함이 느껴졌다.
"어쩌라고, 그냥 니 좋다고 니 집까지 찾아서 쫓아오는 여자가 한둘이 아니잖아. 그게 싫다고."
"다 꺼지라고 할게."
"꺼지면 끝이야? 그러면 없는 일이 돼? 야, 내가 좋아해야해? 내 여친 인기 많다고 좋아해야해?"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아무것도 하지 마."
할 말이 분명히 있었다. 듣고 싶은 말도 있었다. 강슬기가 그래왔듯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비수를 꽂고 살점을 으깨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강슬기와 내 사이에 점을 찍고 싶지도 빗금을 긋고 싶지도 않았다. 잠시 침묵하던 수영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내가 왜 니랑 못 사귀는 줄 알아? 일번, 니 말투 개띠꺼움."
"고칠게."
"지랄마 좀 들으라고. 이번, 여자 졸라 많음. 니가 꼬셨든 니 꼬시겠다고 쫓아온 거든 아무튼간에 개많음."
"다 꺼지라고 할게."
"아, 좀. 삼번. 여자관계 드러움. 야, 내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너 다른 여자들한테 나랑 무슨 사이라고 했냐?"
"친구."
연이어 나오는 간편한 대답들에 수영이 짜증스럽게 말했다.
"아, 띠꺼운 말투 고친다매."
눈이 좌로 굴러간 강슬기가 정정했다. 오늘 재밌는 꼴 많이 본다. 끼부리는 강슬기에 빡친 강슬기에 변명하는 강슬기에 대가리 굴리는 강슬기.
"친구라고 했어."
"무슨 친구?"
"그냥 친구."
"야, 솔직히 니랑 내가 그냥 친구야? 그냥 친구라고 하는 건 솔직히 개구라 아니냐? 그래, 너 그게 문제라고. 습관성 구라가 있다고 너는. 너 니 쫓아온 애들이 사귀는 사람 있으면 뭐라고 하냐? 음, 나는 사귄다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없다구 해야지. 이러고 아니 없어. 이러지? 니 편한대로 쳐 말하잖아. 니가 나한테 안 그럴 거라는 보장 있어?"
"너는,"
"어어어어, 너는 다르다는 말 하지마. 내가 너 십년을 봤는데 너는 진짜 최악의 여자친구감이야."
강슬기가 각 잡고 녹음본 떠놨으면 소송도 가능했을 인격모독을 쏟아내고 나니 후련함도 후회감도 아닌 찝찌름한 기분이 전신을 휘감았다. 눈썹을 찌그러트린 강슬기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미적지근하게 가라앉아가는 맥주를 홀짝였다. 안 하던 짓이라 제대로 분간은 안 되지만 아무튼 간에 지금까지 박수영에게 조금이라도 잘 보이기 프로젝트를 성실하게 행하고 있는 와중에 발모가지에 태클 들어오니 약간 언짢다는 것 같은데 수영은 진심이었다. 강슬기의 서랍장 속에 대충 던져져 들어갔다가 어느쯤엔 아무렇지 않게 폐기처분 되어버리고 마는 강슬기 옛 여자들의 악세서리 중 하나에 뒤섞이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뒤늦게 후련함이 찾아왔다. 찔끔찔끔 들이키던 맥주를 크게 들이키는데 강슬기가 불퉁하게 말했다.
"너도 뻥 치잖아."
"내가 언제?"
"맨날 뻥 치잖아. 너 술게임 그런 거 할 때 첫 경험 언제냐고 물어보면 대학생 때라고 하잖아."
"아니, 미친놈아 그거는. 아니 그리고 그거랑 이거랑 같아?"
"대학생때 아니잖아. 근데 너도 대학생 때라고 뻥치잖아. 나만 치는 거 아니잖아."
맥주를 마신거지 맥주잔을 먹은 게 아닌데 말문이 그대로 틀어 막혔다. 허를 찔린 것인가 어처구니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 아니 미친놈아 그러면 뭐라고 해? 중학생 때라고 해? 그걸 어떻게 말 하냐고. 어떻게 다 솔직하게 말해? 지금까지 했던 곳 중 제일 독특한곳이 어디냐고 하면 커다란 게임기 있던 모텔이라고 하지 누가 강슬기 전전전 어쩌고 전 여친 차라고 말하겠니? 니랑 엮인 일은 솔직하게 말을 할 수가 없어. 알어? 이건 변명인가 질타인가 수영이 쏘아붙이지도 못하고 입을 뻐끔거릴 때 강슬기가 또 다시 쐐기를 박았다.
"너도 연애 하고 그랬잖아. 너도 그랬었잖아. 너도 여자 친구 있는데 나랑 했잖아. 그때 사귀던 여자 친구한테 나 친구라고 했잖아. 너도, 너도 그랬잖아."
방탕한 연애방식에는 안 어울리게 맥주 한잔에도 취기를 느끼는 강슬기가 이다지도 감정적인 얼굴을 하다니. 수영은 경의보단 두려움이 앞섰다.
"너도 다른 사람 좋아면서 나랑 했잖아. 그때 만나던 걔한테 편지 써줘놓고 나랑 섹스했잖아.."
"아니, 그거는."
"나는 그래도 다 너 보단 덜 좋아했어."
수영은 또 다시 본인의 심리 상태에 핵폭탄을 투하한 강슬기를 노려보았다. 수영은 억울했다.
"난 니 그런 점이 싫어. 왜 말을 안 해? 왜 한 번도 말 안했어?"
"뭘."
"나 좋아한다고 말 하면 되잖아. 왜 말을 안했냐고. 말 했으면 됐잖아. 말 했으면 됐잖아. 왜 근데 말을 하나도 안 해? 왜 니 혼자만 알아?'
나란히 앉아 듣던 옛날 노래가 나오는 술집 한 가운데 마주앉아 한참을 침묵으로 보냈다. 십년간 입 쳐 닫고 신비주의 고수하며 박수영을 고문하던 강슬기가 오랜 시간 뜻대로 안 되는 거 하나 없는 인생사에서 박수영 하나 뜻대로 하지 못해 분해 죽겠다는 얼굴로 쥐어 짜 내듯 말했다.
"난 너 좋아하는데 너는 날 왜 이렇게 싫어해?"
헤어 나올래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나의 온몸을 젖게 한 짝사랑의 소용돌이에서 헤엄쳐 나오고 휩쓸리기를 십년이었다. 죽사발이 되어 뭍으로 나올 때마다 물가에 앉아 나를 구경하던 강슬기가 흠뻑 젖은 채 날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영영 가지지 못할 거라 단정 지었던 내 마음의 반쪽을 등 뒤에 숨긴 채.
강슬기가 곧 울지도 모른다는 상상하니 두려워졌다. 얘한테 나는 다를지도 모른다고 행복회로 돌리긴 했지만 정말 다르게 대해주니 어찌 해야 할 도리를 모르고 눈알만 굴렸다. 강슬기를 위로해야 할까 아니면 내가 널 더 좋아했다고 적반하장으로 악을 써야 할까? 내가 기다려오던 말은 왜 듣고 싶지 않을 때 들려올까. 왜 얘는 아주 나쁘지 못해서 날 치졸하게 만들고 나는 단 하나의 선을 넘지 못해서 얘를 치졸하게 만들까?
이젠 반대로 박수영이 입 다물고 신비주의 어필하는 사이, 낯빛이 붉어지다 못해 흙빛이 된 강슬기가 무겁고 커다란 것에 짓눌린 것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가자."
"... 어, 그래 나가자."
"데려다줄게."
".... 됐어. 혼자 갈 수 있어. 안 취했어."
불공평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년을 강슬기 더러운 연애에 얽혀 못볼 꼴 보고 몇 년을 다른 여자랑 시시덕대는 강슬기를 신포도라 정신세뇌하며 도 닦고 지내며 어니쯤엔 절교도 꿈꿨으나 나는 한 번도 이루지 못한 그 어려운걸 강슬기가 단 칼에 해낸다. 나는 단 한 번도 시원하게 말 하지 못했던 것을 본새 빠지지도 않게 뱉어내고 어떻게 저렇게 아쉽고 심란하다는 면상을 하고도 쪽팔리지도 않는지 눈 한번 안 피하고 날 쳐다보는지.
"그냥 데려다 주기만 할게.."
"아... 왜 이래. 진짜."
"데려다주게 해줘."
왜 너는 고통스러운 짝사랑까지 감내하고 인내하여 내 미움을 사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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