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박] 이하 미만
- 익명
"슬기 씨랑 어떻게 친해졌어?"
이 사람도 강슬기한테 관심이 있었나. 필요 최소한의 업무적 접촉만이 오가던 사수가 꺼내놓은 식사 권유에서는 처음부터 꿍꿍이속이 훤히 들여다보였기 때문에, 누구를 소개해 달라는 요지의 용건이 놀라운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대상이 의외였을 뿐. 수영은 음식보다 먼저 식탁에 깔린 본론을 허망히 내려다봤다. 성급한 사람. 노골적으로 뱉을 뻔한 한숨을 냉수에 녹여 삼키며 박수영은 궁한 대답을 짜내려 머리를 굴렸다.
실은 섹파라서요, 저랑 강슬기 씨.
너는 솔직한 게 매력이라는 주변 사람들의 평가대로 그따위의 대답을 포장지 없이 내밀었다간 동성간 성행위에 관한 편견과는 별개로 인간 대 인간 회화의 기초예절을 학습하지 못한 취급으로 증조부모까지 끌려나와 토막내질 게 뻔했다. 수영은 일단 웃으며 얼버무렸다.
"그렇게 친한 것도 아니에요. 어쩌다 다같이 몇 번 본 정도고."
그래? 못 미더운 듯 빳빳한 왼쪽 눈썹을 들썩이는 반응에 무심코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참은 박수영은 때마침 식탁에 놓인 깍두기나 공깃밥 따위를 일부러 부산스레 그의 앞으로 옮겨놓으며 얌전을 떨었다.
"그냥 나이도 비슷하고 여자가 몇 없으니까 그래 보이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보는 사이도 아니고."
"사실은 연락처 알려줬으면 해서 그랬거든."
"제가 막 주기는 조금….그런 거 안 좋아한다는 말을 들어서."
"다니는 운동은 건 없대?취미는?"
끈질겨라. 최선을 다한 우회적 표현이 넌씨눈 배리어에 튕겨나오는 게 눈에 보이는 듯했다. 생판 타인도 아닌 옆 부서 사람 연락처 정도 직접 받아낼 용기도 없으면서 뭘 해보겠다는 것이며, 나한테 알아내서 뭘 어쩌자는 건지. 그런 사적인 불만을 차치하더라도, 딱히 답해줄 말이 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취미 이야기는 해본 적도 없고 애초에 사적인 부분을 얕게나마 아는 사이도 아니며 눈앞의 사람보다 많이 아는 정보라고 해봤자 부득이하게 식사를 함께 하는 동안 획득한 강슬기가 끔찍하게 야채를 편식하는 육식파라는 식습관뿐인 박수영은 무지보단 입이 무거운 척 가장했다.그리고 가식 떨어야 하는 본인 처지에 괜히 열받았다. 선정 사유가 가성비인 것 같은 설렁탕에 밥을 말며 한 최대한 빠르게 먹고 자리를 뜨겠다는 다짐조차 제 뚝배기에 깍두기를 쏟아붓는 식당 주인의 오지랖에 의해 무위로 돌아갔다. 눈 뜬 채 숟가락을 빼앗긴 박수영은 순식간에 벌겋게 물드는 국물을 내려다봤다.허망했다. 회사 바로 맞은편, 직장인 친화적인 가격의 이 식당을 입사 첫 주 똑같은 일을 겪은 계기로 의식적으로 거르고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점심 개조졌네…. 분노에 찬 박수영은 퇴사 후 버킷리스트에 사수 죽빵 갈기기를 추가했다.
예의의 문제였으므로 전화번호의 주인이 누구건 알려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수의 가벼움과 열받은 박수영은 명백히 별건이었다. 까놓고 한 단어로 요약해 질투였고 풀어쓰면 강슬기가 다른 사람과 뒹굴지 않기를 바라는 소망에서 기인한 심술이었다. 두루뭉술한 관계와 그만큼 애매하게 근심 없이 웃을 그 얼굴을 번갈아 생각하다 결국 어찌할 방법도 모르고 구겨버린 것만 벌써 수십 번인. 꾸물거리며 올라오는 심란함과 경계가 완전히 녹아 사라진 국물을 삼켰다.
텁텁했다. 전부 다.
석 달 전의 박수영에게 강슬기는 엘리트라는 이유로 건너건너 소문을 들었을 뿐인 입사 동기였다. 그런데 어쩌다 섹파 먹으셨나요? 물으면 레즈 클럽에서 만났는데 알고 보니 걔가 걔더라고요 혹은 탑엘 쪽지 받고 나가봤더니 동기였어요 등의 아무튼 무언가의 전후 관계가 있는 사연 없이 그러게 말이에요…하고 말끝을 흐려야 했다. 박수영이 뻔뻔했더라면 실물과 처음 만난 날에 계단도 끝까지 올라버렸답니다, 하고 서사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설명쯤은 가능했으리라.
박수영은 술자리로 피로 해소를 강요하는 회식 문화에 대해 한탄하고 있었다. 속으로만. 성과가 저조했으므로 다음 분기에는 더욱 정성을 다해주길 바란다는 부장의 길고 긴 건배사를 들으며 의욕을 내게 하고 싶으면 회식이 아니라 칼퇴근을 주라고 궁시렁대다 건배는 가장 밝은 목소리로 외치는 박수영은 입사 한 달 만에 훌륭히 사회생활에 적응한 상태였다. 되도록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쭈그러들어 움직임을 최소화한 수영의 눈에 몇 개인가의 빈자리가 들어왔다. 회계부가 늦는다더라. 다행히 먼저 물어보는 용기가 필요한 행동을 하기 전에 소식이 들렸다. 회계부에 대한 정보량이 한정적인 박수영의 머리가 가장 먼저 유명인 강슬기를 연상했다.
시간이 흐르는 동안 기억 속에서 다소 희석된 강슬기 씨에 대한 소문을 곱씹었다.막연히 어려운 사람일 거라는 선입견부터 들었다. 아니, 요새는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놀기도 잘 놀던데. 괜한 초조함에 상상 강슬기 씨를 만들던 수영이 어차피 일대일로 얘기할 일도 없을 텐데 무슨 상관이람, 하고 긴장을 풀던 때였다. 얼굴부터 워커홀릭 엘리트인1안과도 쾌활한 분위기 메이커2안과도 조금 다른 리얼 강슬기 씨가 수영의 옆자리에 착석한 건. 새로운 사람들의 등장으로 배는 시끄러워진 회화 속에서 어떻게든 옆자리 사람의 이름을 캐치한 수영은 솔직히 조금 놀랐다.
허둥지둥 뛰어들어와 땀이 맺힌 얼굴로 넉살 좋게 웃으며 연신 고개를 꾸벅거리는 강슬기는 독일에서 통계학을 전공했고 삼개국어에 능통하다는 배경지식을 바탕으로 한 상상과는 꽤나 거리가 먼 생김새였다. 뇌의 강슬기 영역에 동양미를 추가하며 정보를 수정했다. 순한 인상이었다. 둥근 코끝과 쌍커풀이 지지 않은 눈을 곁눈질하던 수영과 눈이 마주쳤을 때도 웃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잔 비었네요, 수영 씨."
불쑥 말이 걸렸다. 의외였다. 통성명을 했던가. 알딸딸한 정신이 제기한 의문을 접고 박수영은 사회생활 표정을 장착했다. 감사합니다. …슬기 씨.짧은 순간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하다 먼저 그렇게 부른 건 저쪽이니까,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고른 호칭이었다. 그런데 강슬기가 밝게 웃어서 수영은 위가 아팠다. 뭘까 이 사람. 이렇게 웃을 타이밍인가. 놀리는 건가. 안 그래도 없는 기운이 빨리는 기분이었다. 뿌리부터 안 맞을 것 같아. 박수영은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외계인 같은 거야 분명. 술잔 가득 찰랑거리게 따라진 소주를 원샷하는 수영을 보고 강슬기는 또 훤한 얼굴 전부를 써서 싱긋 웃었다. 아무리 동기래도 나보단 이 사람이 안쪽에 앉아야 하지 않나 하는 묘한 열등감에 찬 수영의 속내 같은 깨끗하지 못한 사정은 일절 이해 못 할 얼굴이었다. 그리고 강슬기 씨는 솜씨 좋게 웃음을 유지한 채로 수영이 기껏 비운 잔의 내용물을 복원시켰다. 이 사람, 어디 가서 빙썅짓만 하고 다녀도 어지간해선 침 맞을 일은 없겠네. 전의를 상실한 박수영은 감사합니다. 저도 따라 드릴게요. 웅얼거리다 술을 쏟았다. 쪼잔한 복수심이 아니라 알코올성 손떨림에 의한 조준 실패 때문이었다.
손에 묻은 액체를 휴지로 닦으며 다시 사람 좋게 웃는 강슬기가 불편해 수영은 고개를 연신 숙이며 시선을 피했다. 그랬더니 너무 많이 드신 거 아니에요? 물으며 십오 도 정도 반대편으로 기울어진 수영의 몸을 도로 반듯하게 세워 줬다. 그쪽이 줬으면서, 소리가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초면에 싸움 걸 깡은 없는 수영은 얌전히 입을 닫았다. 애초에 입 밖으로 꺼내도 그러게요, 하며 허허실실 웃기나 할 것 같았고 그쪽이 훨씬 대응하기 어려웠다.
외계인과의 교감법을 찾지 못해 난감해 하면서도 끝내 거절은 한 번도 제대로 못한 박수영은 잔뜩 꼴았다. 수영처럼 늘어진 사람들을 곳곳에 만들고 나서야 회식이 파하는 분위기였다. 윙윙거리는 소음 사이로 취객들의 반송법을 논하는 대화와 귓가에 바짝 다가온 누군가의 속삭임이 들렸다. 수영 씨. 설 수 있어요? 강슬기의 목소리라는 건 바로 알았다. 끄덕였다. 그야 설 수 있었다. 끔찍하게 귀찮았을 뿐이다. 내버려뒀으면 하는 마음에 더 이상의 대꾸 없이 가만히 있었는데 인기척이 사라지지 않았다. 구체적으로는 숨결이 닿아서 불편했다. 신경쓰임이 귀찮음을 이겼다. 어렵게 눈을 떴더니 아니나 다를까 강슬기가 정말 가까이서 빤히 보고 있었다. 하나하나 거리가 가깝다고 생각했다. 말로는 안 해도 욕이 가득 담긴 박수영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강슬기 씨는,
"거짓말 같은데."
박수영을 덥석 끌어안고 일으켜 세웠다. 키 차이 때문에 어정쩡하게 기운 몸을 어렵지 않게 지탱한 강슬기의 행동에는 아무 망설임도 없었고 박수영은 큰길까지 나와서야 충격에서 벗어나 과반의 체중을 남에게 맡긴 상황에 수치를 느낄 수 있었다. 꼼지락거리는 박수영을 눈치챘는지 강슬기가 자세를 약간 고쳤다. 팔과 허리가 붙잡힌 건 여전했기 때문에 별로 변한 건 없는 것 같았다. 충격에선 벗어나도 취기와 졸음에선 벗어나지 못한 박수영에게서 구체적인 행선지를 얻어내지 못한 강슬기가 모텔에 박수영을 떨구기로 한 건 그러니까 불가항력이었을 것이다. 도로 골목으로 들어와 모텔 계단을 오르기까지 약 오 분 남짓의 시간 강슬기가 마음속 깊은 곳으로는 지뢰를 거칠게 밟았다고 후회했대도 할 변명이 없었다.
"…졸려요."
"잠깐만, 잠깐만… 거의 다 왔으니까……."
한 손으로는 양심 없이 기대는 수영을 붙잡은 채 다른 손으로 잠금을 해제하고 불을 켠 강슬기는 박수영을 침대에 눕히고 나서야 길게 숨을 내쉬었다. 힘들게 지고 온 박수영을 침대에 그냥 내팽개치는 대신 베개까지 야무지게 뒷목에 받쳐 준 후 더블 침대를 몽땅 차지하고 누운 박수영을 내려다보는 강슬기의 노고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정황만으로 짐작이 가능했다. 글러먹은 건 강슬기의 은혜를 원수로 갚을 심산인 듯 얌전히 잠들지는 못할망정LED 조명을 올려다보다 길고 길게 이어질 사고의 발초를 제공한 당사자 박수영 씨였다.
"저 있잖아요. 저번에 여자친구랑 이렇게 취해서 모텔 왔거든요. 와서 뭐했게요. 잤어요. 당연한가? 아무튼 잤는데, 걔가 너무너무 못하는 거예요. 옷도 엄청 빨리 벗기고 손가락도 빨게 시켜서 기대했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웃기지 않아요?"
합계2인분의TMI를 나불거리는 주둥아리를 빤히 쳐다보던 강슬기가 어떤 사고회로를 돌렸는지 수영이 알게 될 일은 평생 없겠지만, 가만히 눈을 끔뻑거리며 그걸 듣던 강슬기가 한 말은 손쉽게 박수영의 귀에 닿았다.
"그러면 저랑도 할래요?"
박수영의 발화 의도가 취한 나랑 모텔에 들어온 당신, 저랑 자요, 였던 건 당연히 아니었다. 강슬기가 취객의 헛소리의 행간에서 나는 안 잘 사람이랑은 모텔 안 들어온다를 읽어내고 내놓은 답이라 치면, 꽤나 확대해석이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튼, 먹금만이 정답인 출제자의 의도를 파악하시오 문제였지만 박수영이 빨간 펜을 든 채 어라 괜찮은데? 하며 플러스 점수까지 줘버린 것이었다. 아마 얼굴로 큰 가산점을 따냈을 강슬기는 박수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침대에 올라탔다. 대자로 뻗은 박수영의 팔다리 사이에 제 손과 무릎을 끼우며 침대의 균형을 맞춘 강슬기가 재차 물었다.
"어때요?"
뭐라 하기도 전에 먼저 입술이 맞붙었다. 취기가 올라 벌겋게 달아오른 볼, 같은 건 역광이라 잘 보이진 않았고 감기지도 않고 지근거리에서 똑바로 쏘아보는 눈매가 술자리에서 연신 웃을 때와는 정반대로 맹수와 결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의외라고 할지,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어울린다 해야 할지, 혀가 급하게도 입술 틈을 파고들었다. 편하게도 이미 벌러덩 누워 있으니 밀어 눕히는 과정은 생략한 강슬기가 썩 능숙하진 않은 손짓으로 단추를 풀고 박수영은 방 공기가 바뀐 이후 처음으로 입을 떼서 눈이 부시다고 칭얼거렸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전등을 끄고 돌아온 강슬기가 협탁 여기저기를 짚으며 스탠드 전원을 찾느라 허둥거리는 소리가 났다. 먼저 스탠드부터 켰으면 될 것을. 그게 괜스레 우스워서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피식거리던 박수영에게 강슬기가 불퉁한 얼굴로 다시 입을 맞췄다.
무드가 있었느냐 같은 건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마 없었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모텔에 입성했을 때와의 공통점은 성행위를 하려는 이성도 두근거림을 생산하는 호르몬도 아니라 술기운이 실행 버튼을 눌렀다는 것이며, 차이점은 강슬기와 박수영이 아무리 올림해도 애인은커녕 원나잇 대상에도 미치지 못할 사이였다는 것과 강슬기가 박수영에게 오르가즘을 아주 뭉텅이로 꽂아줬다는 것이었다. 수려한 손가락 생김새에 걸맞다고 박수영은 한술 더 떠 본인한테는 못 들려줄 평가까지 내렸다. 수분을 위아래로 빼고 잠깐 의식을 절전시킨 수영이 깨어났을 때, 당연하게 팔베개까지 해주고 있던 강슬기는 자연스레 협탁에 놓인 물병을 건넸다. 벤츠라는 종족이 있긴 한가 봐. 약간의 감격에 찬 박수영은 정사 직후의 나른함과 인간이 범하는 대부분의 과오를 떠안아주는 알코올의 힘으로 맨정신으로는 절대 못 할 말을 꺼냈다. 좋았어요.
그러면 다음에도 할래요? 라고 설렘도 박수영을 향한 특별한 감정도 없어 보이는 맨들한 얼굴의 강슬기가 내민 제안에 박수영은 얼떨결에라기엔 좀전의 쾌락을 다분히 의식한 대답을 했다.예스라고 했다는 뜻이다. 그때의 사고에 알코올이 몇 퍼센트 관여했는지는 당시의 박수영을 데려와 음주측정기를 불게 하지 않는 이상 불분명해도, 알코올이 모조리 분해되고 난 다음 날의 박수영도 강슬기에게 제가 전날은 돌았었다며 머리를 박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아무튼 그래, 한번 하고 나니 사람이 아주 괜찮아 보였다는 것이다. 집 앞까지 데려다주는 과한 배웅과 연락처에 새로 생긴 강슬기의 프로필 사진에 열등감을 모조리 호감으로 치환했다. 전 애인은 이거 하나 못한다고 홀딱 깨더니 강슬기는 이거 하나 잘한다고 이렇게까지 좋아 보일 수 있나. 머리에서 인간을 판단하는 영역을 똑 떼서 아랫도리에 옮겨 심었다는 자괴감이 들었다. 이십오 년 인생을 필요로 해보기는커녕 그런 이름의 관계가 있다는 인식조차 희미하게 살아온 박수영이 하루아침에 섹스 파트너를 획득했다. 그리고 치명적인 문제를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단정하다면 단정하게 사는 동안 쌓아온 인식이 답지 않게 좋았으니까…. 웅얼거린 박수영 본인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버그를 냈다. 박수영의 리비도는 호감을 떼어두고 자립할 수 없었다. 불현듯 찾아온 자각은 부정할 여지도 없이 깔끔했다. 씻고 나온 강슬기의 매끈한 얼굴을 쳐다보다 아, 좋아하는 것 같다. 여태 있던 온갖 연애사를 통틀어 가장 확실한 인정은 박수영이 이렇다 할 태도의 변화도 취하지 않는 동안 무사히 자라났다. 땀으로 달라붙은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강슬기를 올려다보다 아,나 강슬기 씨를 너무 좋아하네. 하루가 다르게 비대해지는 속사정과는 별개로 강슬기와의 관계는1mm도 진전하지 않았다. 만난 첫날 최대치를 찍었다. 여전히 서로에게 몸 겹칠 상대였으며 해석의 차이가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혼자 쏙 변한 박수영만 애꿎은 강슬기를 볼 적마다 곤란하게 됐을 뿐이다. 깊게 생각하면 곧장 답이 나올 불쾌함의 이유를 회피하려 강슬기의 앞에서는 한없이 가볍게 행세했다. 밀려오는 현타를 대가로 줄어들지 않는 내적 갈등을 얻었다. 등가교환의 법칙에게 배신당한 박수영이 머리 싸매는 것도 필연이었다.
말초적인 자극을 추구하기로 정했으면 내친김에 강슬기와의 관계에도 단단히 못을 박고 흔들리지 않게 하면 좋았다. 이상과는 정반대로 박수영은 강슬기와 마주칠 때마다 대지진마냥 흔들렸다. 마음의 준비가 상댱량 필요했으며 매번 정신력이 깎여나갔다. 오다가다 하루에 몇 번씩 지나칠 때도 있음을 고려해 비효율의 끝이었다. 방금도 가벼운 눈인사를 혼신의 힘을 다해 돌려준 참이었다. 면역 획득보다 퇴사가 빠를 듯한 불길한 예감에 한숨이 났다. 파일이 구겨지지 않게 품에 안으며 들어오는 사람들에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까지 밀려나다 누군가에게 어깨가 붙잡혔다. 자동반사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쾌남 흉내 같은 표정을 지은 같은 사무실 직원이었다. 꼴사나웠지만 별수 없이 감사를 표했더니 물리적으로 거리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쎄했다. 예의와 호의를 구분 못 하는 사람이라고 멋대로 평가를 내렸다. 주가가 깎인 남자는 입을 다물지 않았다.
"아침에 말한 거 다 했어?"
"아니요. 아직이요."
"모르는 거 있으면 걱정 말고 물어보래도."
"아…네……."
오늘 안에만 끝내면 되는 거 가지고 뭐라는거야. 속으로만 아가리 파이터인 박수영은 이 꽉 깨물고 대답하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몇 개의 어깨 너머로 여길 쳐다보고 있던 강슬기를 발견했다. 그렇게 흥미진진했나. 이번에는 흐물흐물 풀리려는 얼굴 근육을 자제시켰다. 단순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보다는 당장 스트레스 풀 방법을 찾았다는 게 더 중요했다. 강슬기를 구경하며 강슬기 필터 씌운 말에 적당히 맞장구치다 내리려던 강슬기와 피할 새도 없이 눈이 맞았다. 살짝 벌어져 있던 입이 꾹 닫혔다 다시 열리는 틈으로 혀끝이 잇새를 스치는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흘렀다. 사람들을 뱉어낸 엘리베이터 공기는 쾌적해졌는데 뜨거워지기만 하는 얼굴을 쓸어내렸다. 오늘은 용건이 명확한 연락이 올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얼굴을 식히며 안 온다면 내가 불러내겠다는 다짐도 했다. 그렇게 덥냐는 눈치 없는 질문은 무시했다.
"아까 뭐였어요?"
"아까?"
"엘리베이터에서, 그 남자."
"아아…, 보이는 여자한테 다 집적거릴걸요. 짜증나게."
너무 정색한 것 같아 화풀이로 받아들이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나 괜한 걱정이었다.눈앞의 강슬기는 거의 항상 웃는 얼굴을 잃지 않아서 감정을 읽기 힘들다. 차라리 정색하길 바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나름대로 눈치는 좋은 편이라는 평가를 들어온 수영이 강슬기를 상대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였다.
강슬기는 전희에 공을 들이는 성정이다. 곧잘 이를 세운다. 꽤 비정하게 요청을 무시하고는 한다. 접촉할 때마다 어렵지 않게 강슬기의 습관을 읊을 수 있다. 문득 잠자리 바깥의 강슬기에 관해서는 잘 모른다는 사실이 떠오른다. 친해지는 방법을 물은 사수와 술자리에서 속내가 번들거리는 얼굴로 강슬기의 어깨를 두드리던 팀장이 잇달았다. 강슬기도 질투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은 이내 강슬기에겐 그런 모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냉정한 판단에 금세 지워진다. 나의 강슬기 씨는 그러지 않아…. 실실대고 있으니 강슬기가 어깨를 콱 깨물었다. 아 그래, 다른 생각 하는 걸 싫어한다. 박수영은 꾹 눈을 감아버렸다.
언젠가 강슬기에게 불꽃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는 오그라드는 얘기를 다 한다고 넘겼지만 실은 박수영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 그 순한 눈동자 안쪽에 있는 것이 아무래도 불꽃 같다고. 모르고 만진 순간 흘러나올 열. 그리고 박수영은 아주 확실히 손대버린 뒤였다.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강하게.알아챘을 때는 이미 강슬기에게서 쏟아진 용암에 휩쓸려서, 일부가 되어서,
"웃기는 아저씨네. 수영 씨는 내 건데."
"…또 오글거리는 얘기 한다."
그런 농담에 깊게 숨을 고르고 나서야 대답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습게도 아무 의도 없는 빈말과 할 필요도 없던 대답에 본인이 상처받아서, 내일이 혼약일인 약혼을 파기당한 양 비련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고 만다. 짐짓 화가 난 척 눈썹을 세운 강슬기의 얼굴을 살살 쓰다듬다 눈물이 날 것 같아 매달리는 척 표정을 숨겼다.
"오늘 딴 생각 많이 하던데 무슨 일 있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아니고?"
"……배고파서?"
"그러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갈래요?"
알고 있는 사실의 연장선으로 침대 밖의 강슬기를 한 가지 짐작한다면 먼저 말을 꺼내는 법이 없는 그 버릇이다. 인과관계가 있어도 그러면, 없어도 그러면. 게슈탈트 붕괴가 일어날 지경이었지만 박수영이 가만히 있는 이상 나쁘게는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희미한 보증이기도 했다. 끝나버릴 바에는 지금 그대로인 게 나으니까. 그건 강슬기가 도로 좋아해 주지 않아도 계속할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확신을 이루지 못한 약한 부분에서 불안이 배어나온다.
언젠가는. 영원할 수는 없으니 분명 언젠가는. 강슬기가 본인의 의지로 꺼내는 첫 번째 말이 만나는 사람 생겼어요, 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별다른 수도 없이 어물쩍거리며 축하한다고 말하는 미래의 박수영을 상상한다. 이어질 일들은 불 보듯 뻔하다. 별 접점도 없는 강슬기의 직장 사람D로 돌아간 박수영은 잊힐 예정만이 주어지지 않은 채 모든 것이 끝장난 연정을 혼자서만 언제까지고 질질 끌며 걸어야 할 것이다. 강슬기가 당연하게 던져올 눈인사에, 불현듯 들릴 목소리에,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그 형상에 매번 심장이 덜컥일 것이다.
저급함을 무릅쓸 각오를 해본다. 저기요 저는 그쪽 손가락이랑 입이 좋아요. 그러니까 연애하더라도 그건 떼어주고 가면 안 될까요. 과연 거기엔 정색하고 떠나가는 강슬기와 경멸만 다발로 안은 채 남겨진 박수영을 마지막으로 비추며 엔딩 크레딧이 흘러나오는 결말까지 세트다. 하지만 지금까지 있던 모든 일을 긁어모아서 대체 얼마나 개연성 있는 대사를 만들어낼 수 있겠어요. 그쪽이 좋아졌다고 하는 건 웃기잖아요. 우린 섹스 말고는 아무것도 해본 적 없는 사이인데.
그 사람한테 맘은 줘도 몸은 주지 말라고 기묘한 정절을 요구하는 억지라도 쓸 수 있으면 좋았다. 마음 속으로 생각해본 것들의 반의 반만큼이라도 전할 수 있는 용기가 간절했다.어느 것도 턱없이 부족한 박수영이 입만 몇 번 떼었다 다무는 동안 매번 그 악의 없는 얼굴에 예스를 제외한 모든 대답이 와해한다. 손안에 남는 건 결국 이름 모를 찌꺼기들뿐이라, 수영은 날이 더해질수록 점점 어쩔 줄도 모르게 되었다.
영원히 뛰어내리지 못할 것 같던 번지점프대 앞에서 머뭇거리다 제삼자에게 등을 걷어차인 꼴이었다. 얼굴에 들이밀어진 꽃다발의 목적지를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오히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재확인하는 노력이 필요했다. 3초 전까지 회사 로비라고 생각한 게 착각이 아니었음을 깨닫자 현기증이 일었다. 꽃다발 너머 그리 시선을 올릴 필요도 없는 위치에 싱글벙글한 얼굴이 보였다. 악몽 같았다. 스스로의 가오에 취해 상대방의 수치심과 호감도와 거절당할 가능성 기타등등은 아주 생각지도 않는 무책임한 행동이 불러올 파장에 벌써부터 머리가 아픈 수영이 회피형 인간의 본능대로 도피구를 찾아 허우적거리던 중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쏟아져 나오는 퇴근 행렬에 섞인 강슬기와 눈이 딱 마주친 것은. 답지 않게 기민하게 상황을 살피는 일련의 표정이 강슬기의 얼굴 위를 스쳤다. 아랫입술을 한 번 물었다 놓고 평소처럼 무슨 생각 중인지 모를 매끈한 얼굴로 돌아온 강슬기의 눈빛에 쫓겨 억지로 눈앞의 남자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인내심의 한계인지 반 억지로 품에 안겨진 꽃다발을 들고 좋은 대답 바란다는 남자의 헛소리를 흘려들었다. 모든 신경은 과한 관심을 표하는 눈빛으로 제 갈 길들을 가는 무리의 딱 한 사람에게 향했다. 적어도 시선은 절반 부담하던 남자가 떠나고 로비에 덩그러니 남겨진 박수영은 안 보는 척하며 걸음이 느려지다 조금 떨어진 곳에 멈춰선 강슬기를 의식하고 있었다. 초조함과 뒤섞여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분명한 기대감이 피어난다. 예를 들어 강슬기가, 태연하게 그건 뭐예요? 묻는다. 이런 건 됐고 오늘 뭐 할지나 정하라는 강슬기의 손에 이끌려 어어 하는 새 꽃다발은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그래도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결코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강슬기, 혼자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강슬기를 저울에 달아보다, 박수영은 도망쳤다. 강슬기가 먼저 지나쳐가기 전에.
겉모양은 쿨하게 자리를 떠난 박수영이지만 속까지 그렇지는 못했다. 치졸하게 한밤중까지 핸드폰을 붙잡고 메신저 팝업 뜰 때마다 과민반응하며 이름부터 살폈다. 뜸뜸이 울리는 잡다한 용건의 메시지들 속에서 원하는 걸 낚지 못한 박수영은 혼자만의 자의식 과잉이었음을 시인하기로 했다. 조금 섭섭했다. 꼭 켕겨서만은 아니고 별 사소한 잡담들을 소재로 곧잘 연락하던 강슬기에게 길들여진 탓이었다. 이런 날을 골라서 침묵하기 있기냐. 씁쓸한 기분으로 침대에 누웠다. 하기야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닌데 굳이 말 꺼내봐야 추궁하는 쪽이나 변명하는 쪽이나 난감해질 일이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잠들기 전에 늘상 바라던 소원들의 한 행대로, 강슬기가 질투하면 좋겠다. 강슬기가 안절부절못하면 좋겠다. 강슬기가 눈 뜬 동안 나를 생각하지 않고는 못 배기면 좋겠다. 강슬기가…….
언제 잠들었다는 자각도 없이 감긴 눈이 반짝 떠졌다. 휴일치고는 이른 기상이었다. 핸드폰을 내려놓고 도로 잘까 하다 꺼진 화면을 켜 메신저를 확인했다. 딱히 기대 없는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실눈으로 훑은 빨간 미독 표시가 붙은 목록 중 입면 직전까지 바라 마지않던 강슬기의 메시지가 있었다. 빨간1이 모든 잠기운을 몰아냈다.강슬기. 이따 괜찮아요? 오전3:14. 시간까지 합쳐 열 자 남짓인 한 줄을 거듭 읽다 겨우 답장을 보냈다.항상 그랬듯이 예스였다. 오전 세시 기준의 이따가 언제인지는 몰라도 그야 괜찮았다. 당장 나오라고 했어도 따라 나갔을 테니까. 어이없었다.
눈 딱 감고 고백할 생각도 깔끔하게 접고 즐길 것만 즐기자 체제로 돌아서지도 못한 박수영은 수많은 사례가 증빙된 겁쟁이다. 그러니까 제 잘못은 없어도 확실히 박수영 쪽에서 제공된 특별 이벤트에 가장 화들짝 놀란 건 박수영 본인인 셈이다. 박수영은 쫄았다. 쫄아서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묻지도 못하고 강슬기 집까지 졸졸 따라갔다. 겉모양도 구경할 일 없을 거라 생각한 강슬기네 집안까지 들어가 놓고 감격도 못 느꼈다. 현관부터 시작해 바닥 빼곡히 널브러진 잡동사니를 대충 발로 밀며 길을 만드는 강슬기의 손에 붙잡혀 얌전히 침대에 걸터앉은 박수영은 호감이 있었더라면 최소한 방은 치우고 데려왔겠지 하며 상쾌하지 못한 상념에 잠겼다. 박수영이 그러거나 말거나 옷가지가 쌓인 의자에 앉아 서랍에서 손톱깎이를 꺼내는 강슬기의 비언어적 의사소통은 직설적이었다.주기적으로 들리는 딸깍거리는 소리와 막대가 세 개 꽂힌 디퓨저에서 나는 과하게 달콤한 향이 졸음을 유발했다. 무의식중에 제 손톱도 살폈다. 긁으면 제대로 흉이 질 것 같았다. 끝나면 빌려달라고 해야 하나. 딸깍임을 멈추고 손톱을 꼼꼼히 갈기 시작하는 강슬기의 사전 준비는 오래 이어질 모양이었다.
"맞다, 슬기 씨 여기 살았어요? 옆 동네라더니 꽤 먼데요."
"…이사를 했거든요."
"언제요? 말을 하지. 불편하게. 맨날 데려다줬으면서."
컴퓨터 의자에 무릎을 세우고 앉아 손톱을 불빛에 비추어 보며 확인하는 강슬기의 구부정한 등은 묵묵부답이었다. 뻘쭘해진 박수영은 생활감은 묻어나도 갓 빤 것처럼 섬유유연제 향이 나는 이불 아래로 굼실거리며 파고들었다. 새삼스럽게 기분이 묘했다. 사실 엄청나게 긴장되었다. 복식호흡을 시도하며 평온을 되찾으려 노력하던 중 금속과 금속이 맞닿는 소음이 일었다. 강슬기가 손톱깎이를 책상 아무 곳에나 올려두며 난 소리였다. 정리정돈을 못 한다는 바람직하지 못한 공통점을 발견했다. 아직 현실에 덜 적응한 채 강슬기가 어깨를 누르는 대로 몸을 눕혔다. 헤드 가까이 앉아있어서 그랬는지 가로 방향이었다. 저기 저도 손톱깎이, 하기에는 때를 놓쳤다. 긴장한 박수영은 눈을 피했다. 등에 깔린 베개가 푹신했고 모텔의 부스럭거리는 감촉과는 다른 침구들이 낯설었다. 음. 이 시트,적시면 내가 책임지고 세탁해야 하는 건가. 그런 품위없는 생각을 진지하게 하고 있자니 약간 빈정이 상한 낯을 한 강슬기의 손아귀에 붙잡힌 골반이 주르륵 끌려갔다.
"수영 씨 전부터 자꾸, 다른 생각만 하고."
"방금 거는 저기, 굳이 따지면 다른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 사람 생각해요?"
의외였다. 타이밍도 화제도. 적어도 박수영의 뇌내 파일에서 강슬기 태그는 거의 떨어진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휘둥그레진 눈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좀 더 얼굴이 굳은 강슬기의 손에 의해 몸이 뒤집혔다. 얌전히 베개를 끌어안고 열심히 눈치를 봤다. 차라리 짜증을 냈으면 편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만도 않았다.
"고백이죠, 어제. 어떻게 됐어요?"
"아직 대답 안 했는데…."
"사귀려고?"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르죠.거절하면 그것도 귀찮아질 것 같고, 이렇다할 핑계도 없고."
당연히 좋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나쁠 것도 없었다. 어쨌든 언젠가는 강제적인 탈출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강슬기가 아니면 다 똑같은 누군가들 중의 누군가에게 정을 붙이려고 있는 힘껏 애쓰는 새 이 응어리는 굳이 손댈 필요 없이 녹아 흘러갈지도 모르니까. 그런 가능성 말고는 희망을 걸 곳이 없었다.
"그러면 사귈래요? 저랑. 애인 있다고 해요."
아, 또다. 대체 뭐가 그러면이라는 거야. 이 상황에서 그러는 건 아깝다는 뜻밖에 더 되냐고.물론 강슬기가 아깝다는 이유로 붙잡아도 내심 싫다고는 생각 못 할 박수영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구질구질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체면 차리기일 뿐이었지만. 싫다고 하려는데 팔을 뻗은 강슬기에게 턱이 붙잡혔다. 당장 뿌리칠 수 있는 얕은 접촉인데 온몸이 내리눌린 듯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괜찮죠? 목소리보다 숨결이 선명했다. 애써 모아들고 있던 이름 없는 모든 것들이 걷잡을 수 없이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저 좋아하잖아요."
수도 없이 들은 텍스트가 어투 하나 바꿨다고 이렇게 낯설 수가 있나. 뒷목에 식은땀이 흐르는 느낌이 선연한 건 강슬기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하나도 없던 탓이다. 다물린 잇새로 새어나오는, 짐승의 으르렁거림과도 닮은 음성이었다.
"저는 슬기 씨 안 좋아해요."
"왜요? 거짓말."
"허, 참. 슬기 씨 잘난 건 저도 인정. 그런데 자꾸 맥락 없이 그러면 있던 관심도, 없어지거든요."
"수영 씨 숨기는 거 되게 못하는 거 알죠."
입이 딱 벌어지는 폭거였다. 체크메이트를 당해놓고도 발뺌할 방법을 찾다 박수영은, 강슬기가 지금 당장 침대 밑에서 칼을 꺼내 찔러도 용서하게 될 정도로 강슬기에게 반한 박수영은 무례에도 화는 못 내고 연회색 베개 위로 뚝뚝 떨어져 흔적을 남기는 눈물을 내려다봤다.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처음부터 분명했다. 사실은 몸만이 아니고 마음도. 사이에 놓고 싶은 감정을 꼭 하나만 꼽자면 사랑을. 목적도 방법도 알았다. 무서운 건 딱 하나였다. 쓸 수 있는 걸 전부 써도 닿지 않고 끝날까 겁나 모르는 척 손을 뻗지 않고 있었다.
"저 좋아하잖아요."
"……."
"맞죠?"
좋아하게 될 거다, 도 아니고 바늘 하나 들어갈 구석도 없는 현재형 긍정문. 안 억울한 구석이 없었다. 굳이 굳이 본인 집을 폭로의 장으로 고른 강슬기나 부정할 수단을 아무것도 갖지 못한 저 자신이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에고가 흔들린 적 없을 당당한 낯짝의 강슬기를 상상하다가, 헐떡거리는 숨을 고르다가, 박수영은 자백했다.
"아 그래요. 좋아하는데 어쩌라고요. 이 좆가…, 아니 나쁜 인간아."
"저 좆같아요? 그래도 좋은 거죠?"
"용서할 순 있어도 그야 좆같지 않겠어요. 아니 그래요. 좋은데 뭔데? 그 자신감…."
최소한 오열은 안 하려고 꾹 참는데 턱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지금 처우는 얼굴까지 봐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건가. 힘이 어찌나 센지 고개 돌아가는 걸 막을 방법이 없었다. 있는 힘껏 째려보는 저항이 고작이었다. 눈물 고여 뿌연 시야로도 아까까지의 정색은 어디로 집어던졌는지 아주 화색이 가득한 강슬기가 보였다. 아니 얘는 이 상황에도 이런 얼굴이네. 약간 정이 떨어질 뻔했다. 이 난리를 겪고 미수로 끝난 노답 사태에 앞날이 막막했다.
"아니, 왜 웃어요? 그거, 오해 살 거 뻔하니까 좀 고쳐요. 내가 진짜, 외국물 먹었다고 이러나 이해해볼래도 진짜, 어이가 없어서, 누구 놀리나…."
"놀리는 거 아니고, 다행이다 싶어서."
"뭐가요?"
"그야 저는 수영 씨랑 손도 잡고 싶고, 키스도 하고 싶고, 더 많은 걸 같이 하고 싶다고 맨날 생각하는데, 수영 씨는 아니면 억울하니까."
…응?
귀를 의심했다. 행복 회로 타는 냄새부터 났다. 비밀 이야기를 하는 듯 얼굴을 붉힌 강슬기가 면접 날 봤는데 귀여웠다고 속삭이는데, 존나 인생 최악의 칭찬이었다. 강슬기에게 무한한 호감을 품은 박수영이 듣자마자 이건 아웃이라고 땡땡 망치 두들길 정도였으니 아주 심했다. 모든 일에 정해진 때가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공전절후의 진수성찬이 차려질 때도 이 정도 뜸은 들이지 않을 거였다. 애인과 깨지고 배달된 느린 우체통 엽서를 받아든 심정으로 입을 딱 벌리고 굳은 박수영의 충격이 강슬기에게 단1mg이라도 전해질 날은 요원해 보였다.
"내심 같은 데로 됐으면 했는데. 뭐 그건 어쩔 수 없죠?"
"무슨 몇 달 전 얘기를,왜 아무 말도 안 하고."
"수영 씨도 아무 말 안 해놓고서."
"지금 둘 다 나쁘다는 거예요?"
기운이 쭉 빠졌다. 폐기되었던 강슬기 외계생명체 설에 도로 힘이 실렸다. 강슬기를 붙잡아다 매달고 매도해도 눈만 동그랗게 뜨고 말 슬픈 현실을 파악한 박수영은 전부 인간의 감성으로 어설프게 이해하겠다고 덤벼든 제 잘못인 셈 치자고 빠르게 타협했다. 다만 어쩔 수 없이 상호 이해가 불가능한 언어로도 욕은 퍼붓고 싶어졌다.
"아니 말 안 한 건 그렇다 쳐. 그럼 장난질도 치지 말았어야지."
"그래도 거짓말이라고는 한 번도…, 아야야야야야."
힘껏 걷어차인 정강이를 붙잡은 강슬기를 침대 밑으로 떨어뜨리고 싶은 충동이 부글부글 솟았다. 여기가 저의 집이었으면 진작 쫓아냈을 것이다. 대신 잘난 얼굴이라도 몇 대 때려놔야 분이 풀릴 성싶었다. 베개를 쳐들고 대놓고 얼굴을 조준하는 박수영의 시선에 강슬기는 차인 곳을 문지르던 손을 떼고 허둥거렸다.
"아니 나는, 그냥. 술 먹여서 덮쳤다는 말을 어떻게 해요. 처음에 그런 건 진짜로, 고의는 아니었는데, 그렇게밖에 안 보이잖아요. 회식 같이한단 말 듣고 내가 수영 씨랑 얼굴도장 찍겠다고 얼마나 기대를 했는데. 선배한테 늦게 들어가게 해달라고 부탁도 했다고요, 수영 씨 옆자리 앉으려고. 집도 같은 방향이라고 거짓말하고, 아 그래도 버스 타면 한 번에 오니까 그동안 집 데려다준 거 미안해하진 말아요."
"조금 닥쳐봐요. 지금 좀 빡치니까."
"넵."
"그래서, 죄다 작정하고 한 수작질이었다고."
지금도 선명한 수많은 고뇌의 시간이 쓸데없는 손해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는 전제가 박수영의 모든 인식을 휙 뒤집어놓은 건 아니었지만, 지금껏 몰랐던 문제점은 확실히 수반되었다. 이 구라쟁이랑 여차저차 잘 풀린 후의 매일이 상상했던 대로 마냥 맘 편하지만은 않을 거라는 또 다른 고통의 전조 따위의 것들. 박수영이 예쁘게 키워온 환상을 조금 전 제 손으로 대부분 깨부순 강슬기가 무릎 꿇고 고쳐 앉았다.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고 눈치를 살피는, 사고 쳐놓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 같은 강슬기. 그리고 천재지변의 예고에 더해 어쩌면, 백 개의 잘못도 예쁜 짓 한 번에 퉁쳐질 것 같은 예감.
"저어, 저 꼴 보기 싫어진 거 아니죠. 저 이제 숨기는 거 없어요. 진짜로."
"거참, 설득력이 있는 소리를 해야 듣는 척이라도 해주지."
"진짠데……."
"그래서 어쩌자고요, 저랑."
"솔직히 말하면, 아까 얘기한 거 거짓말 아니고, 이제 섹파는 끝내고…."
"사귀자고요?"
목에 팔을 걸고 확 끌어당기자 얼빠진 얼굴이 천천히 달아오르는 게 웃겼다. 지금까지 시치미 뚝 떼던 건 어떻게 한 건지. 허둥거리다 기운 방향이 앞쪽이라 고의 같아서 더 웃겼다. 강슬기의 목에서 팔을 뗀 박수영은 강슬기 보라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노골적으로 손 따라서 같이 내려가는 강슬기의 시선을 힘껏 비웃다가, 박수영은 그냥.
"그래도 이건 계속할 거죠?"
"당연하죠. 더 많이 해요. 꼭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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